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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협회장 스카이데일리신문 인터뷰기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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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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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1(금) 00:05

“죽기 전에 한글 팔만대장경 만들것입니다”

사업 실패후 천직 택한 현성윤 회장(한국전통서각예술협회)

  

안효준기자(hja@skyedaily.com)

기사입력 2012-06-04 00: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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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성윤 회장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목판 인쇄술을 보유한 국가이다. 국보 126호인 ‘무구정광다라니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고, 해인사 팔만대장경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목판인쇄는 그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수십년간 우리나라 전통서각의 발전을 위해 힘써 온 이가 있다. (사)한국전통서각예술협회를 이끌고 있는 현성윤(58)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목판에 글씨를 거꾸로 새겨서 인쇄를 해 온 우리나라는 목판 인쇄술의 원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통 서각기법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교육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어요”
 
사격선수로 전국 대회 석권하며 맹활약
 
현 회장의 집안은 원래 평안북도 영변군 백령면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18세 되던 해에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오게 됐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총알이 빗발쳤고 갓난아이였던 첫째 누나가 도중에 죽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국에 온 뒤 경찰학교에 입학해 경찰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어와 영어, 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해 미공군 헌병대 유일한 한국인 수사관으로 차출됐죠. 대통령 표창부터 시작해 각종 훈장과 상장을 많이 받으셨어요”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 남들보다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포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김포 바닥에서 놀던 조그만 놈이 서울 시내로 유학을 왔으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를 나가지 않고 평소 관심 있었던 라디오 고치는 기술을 배우러 다닐만큼 방황도 했죠. 일단 기술을 배우고 나니까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그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사격을 시작한다. 삼촌이 종로에 있는 총포사에 데려가 총을 쏘게 했는데 의외로 좋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연습을 통해 첫 출전한 제 2회 대통령기 전국사격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이후 참가한 전국체전을 비롯한 각종 대회마다 1, 2위를 다툴 정도의 실력을 뽐냈고 사격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대학에서 체육 전공보다는 전자공학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광운전자공과대학 응용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서도 사격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전국 대학 사격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사격부에 지원되는 한 학기 예산이 500만원으로 운동부 가운데 가장 많았어요.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도 했고 군 부대에 들어가 사격 지도를 하기도 했죠”
 
전국 45개 속독학원 운영…직원의 배신으로 재산 탕진
 
 ▲ 다양한 삶을 경험해 온 현 회장은 한 때 전국적으로 45개에 이르는 속독학원을 운영했지만 직원의 공금횡령으로 가산을 모두 잃고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데 적극적이어서 방학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자주 했다고 한다. 스티커를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보름만에 실적이 가장 좋은 사원으로 뽑힐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원래 손재주가 있었던 터라 직접 사업을 할 자신감이 생겼어요. 누님의 이름을 따서 ‘애경상표사’라는 회사를 차리고 운영했죠. 몇몇 유명브랜드 상표를 디자인하기도 하면서 사업이 꽤 잘됐어요. 군대를 가면서 누님에게 회사를 넘겨 드렸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그는 대한수기협회에서 지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 몸에 백개의 침을 찌를 수 있을 때 남의 몸에 찔러라’는 은사의 말씀을 새기며 혈을 외우고 지압과 침술을 익혔다.
 
“그러던 중 은사님이 풍을 맞으셨죠. 저도 총각이었고 기술을 확실하게 전수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선생님의 집안을 책임지기로 결심했어요. 일단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선생님 가족께 사무실을 개조해 속독 학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현 회장은 서울대학교 교수가 발표한 속독법의 원리와 지압을 결합해 새로운 속독법을 개발하고 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붐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45개의 학원을 세울 정도였고 하루 저녁에 2500만원이라는 큰 돈을 세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좀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책벌레 프로그램’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개발했습니다. 대기업을 비롯해 각 정부 기관, 교수들에게 강의를 하곤 했어요”
 
회사가 점점 성장하며 법인으로 전환되고 주식회사로 커져나갔다. 하지만 1994년 대규모 자금을 끌어오던 과정에서 밑에 직원이 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부도를 맞기에 이른다. 아버님이 남겨주셨던 유산은 물론이고 집과 땅을 모두 잃게 됐다.
 
“부도 후에 여러 업체에서 회장으로 와 달라는 제의가 있었어요. 마지막까지 도와주던 직원 4명과 함께 한 업체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재기를 노렸죠. 하지만 몇 차례 중역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당초 얘기와 달리 회사에 몇 십억원의 빚이 있는 것을 알게 됐죠”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전자산업진흥회에서 직접 브리핑을 하면서까지 자금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사장과의 의견 차이로 회사를 떠나고 만다. 이를 끝으로 사업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현 회장이다.
 
“우리나라 정통각법은 45도입니다”
 
 ▲ 우리나라의 전통 각법은 이웃나라인 일본과 다르게 45도가 기본이라고 강조한다. 일상적으로 인사하는 각도이면서 전통건축양식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각이라는 것이다.<현성윤 회장, 오른쪽>

여러 사업과는 별개로 그는 전통서각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때부터 전통 서각을 해 왔다고 한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현 회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우리 선조들은 현판에 글씨를 새기는 일을 하셨다’며 말씀해 주셨지요. 제가 학원을 크게 운영할 당시 수십 개의 학원마다 간판을 직접 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양각이나 음양각 등 다양한 각법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셔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현 회장이 본격적으로 서각을 시작한 것은 1983년도 ‘철재’라는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칼날로 나무를 깎는 방법으로 서각을 하는 반면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칼을 잡고 때려서 나무를 깎았다고 한다.
 
“지인의 소개로 무형문화재인 ‘철재’ 선생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광화문 현판을 제작하신 분이기도 하죠. 당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니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던 각법들을 그대로 하고 있어서 ‘이것이 내 운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현 회장은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 서각은 양각, 음각, 음양각, 화서각 등 여러 가지 각법을 사용해 2차원적인 나무 판제에 입체적으로 표현해 내는 3차원적인 종합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민족의 정통 각법은 45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옥의 처마 끝도 45도이고 버선의 코도 45도이듯이 서각도 그렇지요. 일본에서 주로 이용하는 90도로 꺾어지는 것과는 크게 다르죠.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이러한 이론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체계적 이론 정립…제자 5000여명에 달해
 
 ▲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국전통서각예술문화원’에는 전통서각을 배우기 위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전통서각의 우수성과 대중화를 위한 체계적인 이론 정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느낀 그는 1986년도에 ‘한국전통서각예술’ 이론 서적을 집필하고 발표한다.
 
특히 KBS와 EBS, 불교TV에서 전통 서각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나갔다. 하지만 책이 출간되고 강의를 하면서 각자장이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심지어 하루에 수십 통의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예전 장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죠. 그러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부의 사람만 접하는 전통 문화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전통 서각은 3개월 정도만 배우면 누구나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그는 2008년 12월 사단법인 ‘한국전통서각예술협회’를 만들고 교육 기관인 ‘한국전통서각예술문화원’에서 서각에 관심있는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년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만 5000여명에 이른다.
 
현 회장은 몇 년 전 지방무형문화재로 위촉을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남고 싶지 비법을 숨기는 장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최근 서각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는 무형 문화재로의 위촉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현재 지방 정부와 심의 중이라고 밝혔다.
 
통일에 대한 염원 담아 ‘한글 팔만대장경’ 제작
 
 ▲ 지난 2010년 일부 제작된 한글 팔만대장경 전시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명성황후 기념관 현판, 설악산 백담사의 원목통판 8미터 일주문 현판, 평택 쌍룡사 현판, 대전 엑스포 남문현판, 남한산성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관 내 서각 등 그의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현재 현 회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한글 팔만대장경 제작 사업이다. 국난 극복을 위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진지 천년이 지났지만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강조한다.
 
“팔만대장경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새로이 탄생시키고자 합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여러 지자체와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해 번번히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최근 한 지자체와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의 한글판은 약 80만장의 목판으로 제작될 계획이다. 현 회장은 80만명이 한자리에 모여 경문을 낭독하는 행사가 진행된다면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관광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죽기 전에 한글 팔만대장경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특히 정부와 협의가 된다면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을 북한에도 나눠 설치하고 싶어요. 더불어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돌아가신 아버님을 고향인 북한 영변에 다시 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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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의견 총 6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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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견
친구   2012-07-28 16:35       
내 친구 라는게 자랑 스럽습니다.
공덕  2012-07-28 16:33       
존경 스럽습니다.
공덕  2012-07-28 16:32       
존경스럽씁니다.
장군  2012-06-21 14:41       
기인 이기에 해 낼 수 있습니다.이 시대의 장인에게 축복있으라.
보리수  2012-06-21 14:36       
꼭 이어지시길 합장하여 기원합니다.
보리수  2012-06-21 14:35       
꼭 이루어 지길... 합장하여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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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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